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고여 피살 사건 (문단 편집) === 용의국가 1: [[고려]]([[최우]]) === 사건 보고를 받은 몽골 측은 고려인들의 소행으로 간주했다. 그리하여 몽골은 곧바로 고려에 국교 단절을 통보했고 그를 빌미로 6년 후 고려로 침입하게 된다. 몽골이 고려를 의심한 이유는 1231년에 그들이 침입했을 때 당시 [[몽골군]]을 이끌었던 원수 [[살리타이]](撒禮塔)가 고려 조정에 보낸 편지에 어느 정도 드러나 있다. >만약에 너희들이 투항했다면 우리들은 사신 저고여(瓜古與)[* 한자를 읽으면 과고여인데 이것은 조(爪)의 오기(誤記)이다.]를 너희에게 보낼 뿐 너희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저고여는 살해당했다. 우리들은 사신을 파견해 저고여를 찾으려 했으나 너희들은 화살을 쏘아 저고여를 찾으러 간 사신을 쫓아내었는데 이는 너희들이 저고여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 > - <[[고려사]]> 권 23 세가 23 고종 2 고종 18년(1231년) 12월 즉, 몽골 측에서 저고여의 시신을 찾기 위해 사신을 보냈는데 고려 측에서 그 사신 일행들을 향해 화살을 쏘아서 쫓아냈다는 것이다. 만약 고려가 결백하다면 당당하게 저고여의 시신을 넘겨주고 결백함을 호소했을 것인데 사건 조사를 위해 온 사신들을 향해 경고 사격을 가해 쫓아냈다는 것은 뭔가 뒤가 구리다는 뜻이므로 이로 미루어볼 때 고려 사람들이 저고여를 살해했다는 것이 몽골 측의 주장이었다. 물론 고려 측에서 정말로 저고여를 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저고여는 고려에서 수시로 행패를 부리고 다녔던 질 나쁜 자여서 고려인들치고 그에게 원한이 없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사건이 고려의 소행이었다면 이 사건을 일으킨 주체가 누구였을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범인이 고려 사람이라면 가장 유력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실권자 [[최우]]이다. 암만 최우가 멍청하고 무능했다기로서니 그렇게 앞뒤 계산 없이 엄청난 일을 저질렀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 최우라는 인물은 대단히 [[막가파]]적 인물로 대책없는 막장 외교를 구사했던 인물이었다. [[여몽전쟁/평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생각보다 그 전쟁은 큰 전란에 휘말리지 않고 끝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최 씨 정권 측 집권자들은 자신들 정권 수호에만 눈이 멀어 몽골군이 쳐들어온다고 하면 부랴부랴 항복한다고 사신을 보냈고, 몽골군이 그 말을 믿고 항복 시 이행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철군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차일피일 핑계를 대며 모든 합의 사항 이행을 배째고 버티다가 유야무야 파기해버리는 짓을 '''30년 동안''' 반복했다. 덕분에 죄 없는 고려 백성들만 들락날락 처들어오는 몽골군의 칼날에 죽어나갔다. 또 최우는 1232년에 [[서경(고려)|서경]]에 주둔했던 72명의 [[다루가치]]들을 모조리 살해했던 적도 있었다. 그야말로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그 때 그 때 기분에 따라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보는 인물이었다. 본래 역사서에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만 기록되다 보니 당시 고려 백성들의 여론 등에 대해선 <[[고려사]]>에 그다지 많이 기록되어 있진 않다. 다만 당시 몽골 측에서 요구한 공물의 양이 매우 과도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을 것이고 이렇게 몽골에 끌려다니는 조정의 태도에도 당연히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볼 때 최우가 국민적 불만을 잠재우고 정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 뒷일을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고여 일당들을 살해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한편으론 나름대로 몽골 측에 경고 메시지를 던져주는 효과도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무시하고 깽판치면 저고여같이 뒈질 줄 알아라!"는 메시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우가 이 사건의 범인이란 사실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 물론 몽골 측에는 공식적으로 "우리 소행이 아니다."고 부정했겠지만 그냥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기록하는 역사서에까지 그걸 숨길 필요는 있었을지 의문이다. 공식적인 외교 문서에는 당연히 "이건 우리 소행이 아니다."고 적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우리나라 안에서 돌려보는 역사서에는 최우가 범인이라면 "최우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저고여 일당들을 죽이라고 지시했다."는 식으로 기록이 되었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1232년의 다루가치 살해 사건은 최우가 사람을 보냈다고 한, 몽 양쪽 사서에 다 기록되어 있다.[* 물론 내용은 조금 다르다. <[[고려사]]>에는 최우가 내시 윤복창이란 사람을 보내 다루가치들의 무장해제를 하고 오라고 명했으나 윤복창이 선주에 도착하자마자 다루가치가 쏜 화살에 맞고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민희와 최자온이 서경에서 다루가치 살해를 모의하였으나 서경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최자온을 가둔 뒤 최임수 일행은 저도로 도주했다고 나와 있고 <[[동사강목]]>에는 민희와 최자온이 다루가치들을 모살하다가 서경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나왔다. 반면에 <[[원사(역사책)|원사]]>나 <[[신원사]]>에는 고려 측에서 사람을 보내 다루가치들을 몰살했다고 적혀 있다. 이를 보면, 다루가치들의 전부는 아니지만 다루가치들의 대부분이 살해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